본문 바로가기

강의

160122 <<알라>> 출간기념 좌담회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다?! - <<알라>>를 통해 종교 갈등의 원인과 화해 가능성을 모색하다.

-지난 1월 22일 다녀온 좌담회의 내용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해가 되는 부분도, 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당시 배포하였던 발제문과 볼프의 인터뷰영상을 확인하면 좋을 것이다. 각각은 글 아래에 링크를 달아두었다.


제 1 부. 기조발제. <기독교인과 무슬림의 신은 동일한다?> 김선욱 교수(숭실대 철학과)

1. 들어가는 말

 무언가에 대한 정보를 파악할 때, 그에 대한 객관적이고 다방면의 정보를 수집하기보다는, 지인, 혹은 널리 알려진 부분적인 상식에 기반한 '추측'에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가 이슬람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는 경로 역시 이와 유사하다. "중동에 다녀오신 '선교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로 시작하는 카톡 단체방의 글이나, 교계 지도자의 말씀이 이슬람 이해에 대한 유일한 통로이다. 중동경제가 우리나라의 경제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고, 유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인적 교류가 활발해지는 상황에서 이슬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알라>>는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은 같은 신인가?"라는 질문을 화두로 삼는다. 이 질문을 통해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인의 오해를 덜어내고, 이슬람의 실체를 보다 정확히 짚어내고자 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인들의 신앙의 차원에서 이슬람이 지니는 영향력은 미미하다. 이슬람이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부분, 이슬람에 대한 이해를 유도하는 영역은 주로 '테러'이다. '이슬람-알라-테러'는 밀접한 연관관계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두 종교의 신이 같은 존재일 수 있다는 볼프의 주장은 충격적이라 할 수 있다. 두 신이 같다는 주장은 어떠한 근거에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2. 어떤 근거로, 어느 정도로, 왜?

 먼저, 볼프는 '규범적 주류 기독교'와 '규범적 주루 이슬람'의 입장을 토대로 삼고있다. '규범적' 입장이란, 성서와 꾸란에 각각 확실히 기초하며, 해석과 논의의 전통을 잘 이해하는 가운데 서 있는 신앙 전통의 주류이 입장을 말한다. 이러한 입장을 세운 이유는 "크리스찬과 무슬림이 신과 신의 명령에 대한 각자의 신념에 충실하면서도 그들이 같은 정치적 지붕 아래 평화롭고 건설적으로 공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즉 크리스찬과 무슬림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면서 이루어지는 평화로운 공존의 가능성을 위해 양자의 신이 공통적인가라는 점에서 이 질문이 중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선 기독교의 '하나님', 혹은 'God'과 이슬람의 '알라'가 같은 존재인지 "발견"해야 한다. 서로 다른 두 종교의 절대자가 같을 수 있는 가능성은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그 신앙의 내용이 다르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이 모두 유대인이었기에 이들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유대교의 하나님과 동일했다고 생각했다.(이는 신약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는 기독교가 처음부터 '믿음의 내용이 다르더라도 동일한 신을 섬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아브라함계 종교이며, 전승의 일부가 공유되고는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ex. 십계명중 9가지 계명이 코란에서도 나타난다.), 이정도의 근거로 두 신이 동일하다고 논지를 전개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신과 이슬람의 신이 같다는 것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근거를 찾기에 앞서, 유일신을 믿는 두 집단이 있을 때, 이들은 상대에 대해 두가지의 입장을 가질 수 있다. 

     첫째, 우리 집단과 상대 집단이 같은 존재를 믿고 있다. 

     둘째, 상대 집단은 집단적 망상에 빠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에 대해 집단 망상에 빠져있는 이들이라 말해야 하는가? 이슬람도 나름의 진지한 신앙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전재하고, 그들이 믿는 알라에 대한 내용을 검토해야 한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볼프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말하는 '신관'이 아래와 같은 점에서 일치한다고 말한다.

     1. 신은 오직 한 분이다.

     2. 신은 신이 아닌 모든 것을 창조했다.

     3. 신은 신이 아닌 모든 것과 다르다.

     4. 신은 선하시다.

 위의 네 가지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경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신이 전지전능한 창조주라는 1~3의 믿음에 더하여 신은 선한 존재라는 4의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신은 '악한 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볼프는 여기에 두 가지 믿음을 더한다.

     5. 신은 우리에게 모든 존재를 다해 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6. 신은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1~4에 동의를 한다면, 5와 6은 그 동의를 강화시키는 믿음이 된다.위의 6가지 믿음에 동의한다면 두 신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나 이슬람이 예배의 모습과 신에 대한 믿음에 대해 차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위의 6가지 믿음은 크리스찬과 무슬림이 동일한 하나님의 예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충분한 유사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유의해야 하는 중요한 차이점은 무엇인가? 먼저 무슬림은 기독교인이 믿는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크리스찬는 이슬람에 내재된 '폭력성'으로 인해 이슬람의 '사랑'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먼저 이슬람의 입장을 살펴보면, 무슬림의 신앙체계에서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은 천지를 창조하고 돌보는 유일신의 '단일성'을 철저하게 믿기 때문에, 신의 단일성을 부정하는 삼위일체는 신성모독에 해당한다고 본다. 즉 무슬림의 '삼위일체' 개념은 세 신을 말하거나, 한 신에 신이 아닌 둘을 덧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삼위일체' 개념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과 분명히 다르다. 크리스찬들도 신의 '단일성'을 철저하게 믿고있다. 크리스찬이 믿는 '삼위일체'라는 개념은 예수와 성령이 하나님보다 열등하다거나, 신이 아니라거나 하는 개념이 아니다. 크리스찬의 '삼위일체'라는 개념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삼위일체에 대해 논리적이고 이성적, 과학적인 설명은 불가능하다. 크리스찬의 '삼위일체'는 인간 인식의 한계 내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렇게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어려운 삼위일체 관념을 기독교인이 믿고, 수호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삼위일체 관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다음으로 기독교의 입장을 살펴보면, 크리스찬은 이슬람 가운데 폭력이 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알라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의 존재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조직, 테러집단은 이슬람 세계 중에서도 극히 일부 무슬림만이 인정하고 있다. 대다수의 규범적 무슬림은 자살테러 등 폭력행위를 비난하고 있다. 물론 꾸란에 폭력이 명시되어 있니는 하지만, 이는 언제나 정의로운 명분과 연결되어 있고, 무찰별적이지 않고, 비전투인, 여자, 아이를 향하지 않는다. 무슬림 과격 폭력 집단은 비 무슬림 뿐 아니라 무슬림에게조차 위협적이라는 점을 볼 때, 폭력집단의 존재를 근거로 이슬람이 폭력의 종교라고 판단하는 것은 과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이런 폭력 집단은 기독교에도 존재했으며,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이슬람보다 더 폭력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독실한 기독교인 혹은 무슬림이 폭력적 테러리스터가 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볼프는 "예배에서 지칭되는 신"과 "삶을 통한 예배에서 실제로 예배하고 있는 신"이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전자는 믿음의 영역과 고백적 표현의 내용이지만, 후자는 실질적 영역이고 실천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을 함락한 십자군은 이교도의 머리를 베면서 '크리스투스 도미누스' 즉 '그리스도는 나의 주님'이라고 외쳤고,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은 '알라후 아크바르' 즉 '알라는 위대하시다'를 외치며 폭탄을 터트린다. 이들이 믿는 하나님, 혹은 알라는 피를 부르는 힘의 신이라는 것이다. 크리스찬이든 무슬림이든 이웃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한에서만 한 분의 공통적인 참 신에계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볼프는 왜 이런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가? 그것은 앞서 언급하였듯, 크리스찬과 무슬림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볼프는 정치신학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논지 전개로 인해 크리스찬과 무슬림이 공통의 신, 사랑과 자비의 신을 믿고있다고 한다면, 서로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는 달가운 소리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위의 논지가 논리적, 신학적으로 사실이라면, 싸움의 원인이 '신앙'이 아닌, 자기 자신 속의 '욕망'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복된 소식이 될 것이다. 세계 인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이 크리스찬 혹은 무슬림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다면 극빈층, 물부족, 환경 파괴, 전염병 등 이 시대의 보다 시급한 문제과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쾌락주의와 황금만능주의 등을 해결하기 위해 협력할 수 있는 동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신을 믿는다는 것이 곧바로 협력과 공존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같은 종교권 내에서도 수많은 분쟁과 전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분쟁, 전쟁의 원인은 최소한 '신의 명령'에 의한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에는 분쟁의 원인이 주체들의 이해관계 혹은 정의의 문제로 환원되며 문제의 원인이 '신의 명령'인 경우보다 훨씬 쉽게 판단되고 해결된다.

 크리스찬과 무슬림은 분명 서로의 신앙의 기초에서 상대를 보호하고 도울 수 있다. 이는 단순히 휴머니즘에 입각한 것이 아니다. 사랑이신 하나님(혹은 신)을 믿는 신앙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명령을 바탕으로 서로 사랑의 상호성을 이룰 수 있게 한다.


3. 우리에 대한 의미

 볼프는 크로아티아 출신으로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겪은 사람이다. 이러한 경험이 종교간의 화해를 주장하는 개인사적 배경으로 작용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인에게는 이러한 종교간 분쟁이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 한국의 개신교는 민족의 각성과 계몽을 이끄는 역할을 했으며, 일제 강점기와 그 이후의 시기에 개인과 사회의 구원을 위해 노력한 종교이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었고, 교회와 학교가 문을 닫았다. 한국의 개신교인에게 '기독교'는 수많은 목숨을 바쳐 지켜낸 가치이다. 또한 세계기독교에서 칼뱅주의자의 비중이 적은데 비해 한국의 경우에는 칼뱅주의자의 비중이 상당하다.

 구원의 문제를 중심으로, 선교에 열정적이며, 기독교라는 가치에 대해 헌신적인 한국의 기독교인에게 이슬람과 기독교의 신이 같다고 말하는 볼프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볼프의 주장은 '구원론'의 차원이 아닌 '정치신학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책에서 누차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정치신학적 내용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반성의 경험을 준다.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공통의 신을 믿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은 내가 믿는 믿음에 대한 명료한 이해와 반성,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진실성 검토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내가 믿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내가 드리는 예배, 내가 예배 드리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자의 진정한 예배의 모습에 대해 다시금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앙의 순수성과 구원의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믿음,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한국 개신교 교회의 신자에게 이 책의 주장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 지켜온 신앙의 순수함과 선교의 열정이 우리 자신과 선교 대상에 대한, 그리고 양자 간의 신앙적 관계애 대한 오류 없는 확살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슬람에 대한 대대적 선교운동은 오히려 무슬림에게 공포와 분노를 유발하였다. 기독교의 선교는 무슬림에게는 일종의 전쟁으로 간주되었으며, 기독교적 서구가 중심이 된 세계화는 이슬람에 대한 착취와 문화 파괴의 결과를 낳았다. 또한 미국에 의해 아랍의 폭압적 정권이 지지, 지원되던 것 역시 기독교적 서구에 대한 공포가 된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기독교의 선교는 다음과 같은 규칙을 기초로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그들의 신앙을 당신에게 전할 기회를 줄 준비가 되었을 때에만 신앙을 전하라.

    둘째, 그들이 당신에게 신앙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그들에게 전하라.

이 두가지 규칙과 관련하여, 특히 두번째의 규칙에 대해 볼프는 다른 사람에게 신앙을 강요하지 말 것, 뇌물을 주거나 현혹시키는 방식으로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할 것, 자신의 가장 훌륭한 신앙의 실천과 다른 신앙의 가장 나쁜 실천을 비교하지 말 것을 덧붙여 설명한다. 이런 방식이라면 이슬람이나 기독교의 선교가 서로에게 공포를 유발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에 대해 가지는 공포는, 이슬람이 기독교에 대해 갖는 공포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갖는 공포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떠도는 추측이나 억측을 사실인 양 받아들이는 데서 발생한다. 사실상, 우리는 잘 알지 못할 때 공포심을 가질 수 있고,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공포심은 잘 알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져야지, 오해에 근거한 비이성적 행동이나 나아가 배타적, 폭력적 행동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이런 행동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폭력, 테러의 주요한 원인이 되기 마련이다.

 제대로 알려하는 노력은 많은 노력과 인내를 요구한다. 연구과정을 필요로 한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보이는 이슬람 포비아는 무지에 근거한 잘못된 현상이다. 그렇다고 이슬람을 두손들고 환영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과 관련된 여러 현성과 문제에 대해 올바르게 분별하고 판단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덧붙여 신학적 인식과 현실종교적 영향력 사이의 불균형 역시 조정해나가야 한다. 신학자의 영향력보다 교권주의자들의 영향력이 더 큰 상황에서 이슬람에대해 올바르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참된 지식'에 더욱 의존해야만 할 것이다.


발제문 링크: https://www.facebook.com/IVP.Korea/posts/961305407291339


제 2 부. 볼프와의 화상 대화.

대화 이전에, 볼프에게 3가지 질문을 미리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 질문은 아래와 같다.

Q1.

 이번 책 <<알라>>는 교수님의 전작들, <<삼위일체와 하나님>>, <<배제와 포용>>, <<광장에 선 기독교>>, <<기억의 종말>>, 등과 어떤 연관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ivp가 번역, 출간한 <<광장에 선 기독교>>와 앞으로 줄간할 <<Flourishing>>과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그런 자신의 책들과 최근 책들과 <<알라>>의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Q2.

 이슬람과 기독교의 신이 같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슬람뿐 아니라 기독교 내에서도 이견이 존재합니다. 우리나라 기독교는 교수님이 논의의 효율성을 위해 '규범적 주류 기독교'에서 제외시킨 강경파 칼뱅주의(Hyper Calvinist)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큰 반발, 혹은 최소한 논란이 예상됩니다. 실제로 최근 교수님은 기독교의 유일성을 강하게 주장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과 논쟁 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런 보수주의자들의 유려와 비판을 어떻게 대하고 있으며, 반대로 출간 이후 무슬림학자들과의 대화 가운데 얻은 확신이나 추가연구가 필요한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Q3.

 한국 기독교인들은 구원 문제를 유보하고, 신학적 문제를 정치신학적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거부감을 느낍니다. 실제로 교수님의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이들이나 심지어 읽은 이들도 알라와 야훼가 같다는 주장이 결국 선교 무용론에 이를 것이며, 기독교의 유일성을 훼손할 것이라고 우려를 표합니다. '같은 신을 섬기고 있다.'는 주장과 선교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지요?

A1. 

 먼저 삼위하나님은 사랑이며,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은 피조물이며 타락한 존재이다. 예수는 하나님 계시의 최종적 모습이며, 우리를 대신하여 주었기 때문에 인간이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를 근거로, <<알라>>에서 답을 찾고 싶었던 질문은 '무슬림을 어떻게 품을까?, '글로벌 시대의 공통의 선을 추구하 수 있는가?', 결국. '이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이다. 이러한 질문을 바탕으로, 이슬람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진짜 모습'을 봄으로써 그 안에도 있을 진리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었다.

 질문에 답을 하자면, <<알라>>는 이전 저작의 내용들을 수용하는 책이다. 기독교적 맥락 안에서 이슬람을 포용할 수 있는지 탐색하였고, 두 종교간의 차이를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탐색한 책이다.특히 두 종교의 공유점을 재확인하는 점에서는 <<기억의 종말>>, 공적영역에서의 개신교의 역할을 탐색하는 점에서는 <<광장에 선 기독교>>와 관련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A2.

 "기독교는 유일한 종교가 아니다", 혹은 "기독교와 이슬람은 동일하다."라는 명제는 이 책이 주장하는 바가 아니다.

 이 책이 주장하는 것은 "다른 이해를 가지고 한 대상을 예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명제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먼저, 성경과 코란에 등장하는 신에 대한 묘사가 다르지 않다. 야훼와 알라 사이에는 상당히 많은 유사점이 존재하고 있다. 신의 '특징', 혹은 '성격'으로 '유일함, 영원함, 자비함, 공의' 등을 묘사하고 있다. 특별히 구약의 야훼와 코란의 알라 사이에는 '명령하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이 유사하며, 십계명 중 안식일을 제외한 9개의 계명이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두 종교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지점은 먼저 '예수'와 '삼위일체'이다. 이슬람은 예수와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두 종교가 다른 신을 섬긴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유대교'의 경우에도 에수와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지만, 많은 개신교 성직자와 신학자들이 두 종교의 신(야훼, 성부)를 동일한 존재로 이해하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의 왜 '예수'와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은가? 이는 이슬람이 이 두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삼위일체'라는 개념을 단일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3 존재의 신을 섬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신에대한 이러한 이해는 기독교에서도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예수를 신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3가지의 위격(혹은 모습)으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라는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삼위일체'이다. 그렇기 때문이 '인간'으로 오신 예수를 '신'이라고도 생각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A3.

 정치적인 목적으로 신학 논제를 전개하기 위해 선교를 수단시하는 것은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치적 영역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은 분명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여 정치 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해야 한다. 물론 이 경우에도 정치 문제를 우선해서는 안된다.

 덧붙여,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게 예수와 그의 십자가, 즉 복음을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어떻게 전할 것인지 그 방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 어떤 방법으로 전해야 하는가? 그동안의 선교은 무력적이었으며 상업적이었다. 식민지 개척기에는 선군사 후선교의 방식으로, 제국주의와 그 이후에는 선물질(교육/의료/자본 등) 후선교의 형식으로 선교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기존의 방식이 과연 옳은가? 참된 선교는 선교대상에 대한 사랑과 존중, 겸손과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 3 부. 토론회

Q1. 한국과 이슬람의 관계는 어떠한가? to. 변상욱 대기자

 역사적 시초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로 올라간다. 김유신묘 등 신라시대 유물에 서역인의 모습이 나타나며 이는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존재일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신장 지역에 거주하던 이슬람 계통의 사람이 왕래했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한국전쟁때 터키군이 참전하였고, 이를 계기로 현대한국에 이슬람이 접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중동 붐때 파견된 노동자들 중 일부가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이들의 귀국과정이서 이슬람이 한국에 유입되기도 하였다. 현재 한국에는 약 15만명의 이슬람 신자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 이중 약 5만은 한국인이고, 나머지 10만은 동남아시아 등에서 유입한 노동자들이다.

+ 9.11. 이후, 하나님이 보호하심을 거두셨다는 근본주의의 해석이 등장. → 이에 대한 대응 (1) 자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음, (2) 정권`정략적 안보태세 전환 = 이러한 두가지 모습은 한국 모습과 유사하다.

 ex) 선거국면에 들어서면서 '승리'가 필요해짐 - '세력 결집' 필요 - 가상의 적 형성 = 2016 총선-기독교계 정당 창당 - 반이슬람, 반동성애

+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기독교와 이슬람의 반목을 '허구'라고 서술하고 있다. 핵심은 '종교'의 충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침략과 이에 대응하는 '전통주의'의 충돌로 해석하고 있다. 또는 석유 침탈 세력과 이에 대응하는 산유지역 세력간의 충돌로 볼 수도 있다. IS의 급속한 성장도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석유침탈 세력은 산유지역 세력의 균열을 내면서 자신들의 이권을 획득하였지만, 균열된 산유지역 세력 중 친미, 친EU 세력을 자신들의 세력권에 연합하지는 않았다.(전략적 도구 이상의 가치 두지 않음). 이로 인해 친미, 친EU세력이 의도적으로 IS진압에 소극적으로 나서며 미국과 EU 등 석유침탈 세력에 대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결국 문제는 '억압과 착취'에 기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① 진짜 문제에만 집중한다. 오늘날 한국사회, 한국 기독교의 '진짜 문제'가 '이슬람'인가? 교회세습, 교회 재산 부정 탈루 등은? ② 과도한 반응을 하지 않는다. 문제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과도한 반응'을 하지 않는다. 한국은 북한에, 일본은 후쿠시마에 '시큰둥'하지 않은가? ③ 공생을 위해 실천해야 할 것은 실천해야 한다. 기독교의 태도는 배척과 적대에 있지 않다. 화해하고 사랑해야 한다. ④ 한 세력에 대한 과도한 경계나 배척은 금물이다.


Q2. 야훼와 알라를 동일하게 이해했다는 루터의 입장은 이해하겠지만, 칼빈과 장로교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to. 송용원 목사

 칼빈은 신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을까. 칼빈은,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지하는 감각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하나님을 느끼는 것(+각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것)과 하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예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프가 주장하는 '기독교와 이슬람은 동일한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주장은 신학적으로 타당한 면이 있다 할 수 있다.

 다만 한국의 칼빈, 장로교는 예정론과 칼빈 이후에 나타난 형식과 제도적 측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알라>>의 주장이나, 앞서 언급한 칼빈의 인간/신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 같다. 따라서 한국의 칼빈주의, 장로교들은 Original Calvin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 루터나 칼뱅을 비롯해 알라와 하나님의 동일성을 인정한 사람들도 '구원'에 있어서는 기독교의 유일성을 인정했다.

(+ 이 책은 일반사회의 '공통선'에 대한 책이다. 이슬람이 예수를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고도 주장하고 있다. + 강의/도서의 내용과 더불어 자크 엘륄의 <<이슬람과 기독교>>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두 책은 다른 말을 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한 맥락(삼위일체에 대한 강조)에서 저술되었다.)


Q3. 공통선. Common Good.

 칼빈이 이해하는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와의 연합, 즉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에 '공감'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아파하시는 일에, 기뻐하시는 일에 아파하고 기뻐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칭의'는 Status의 문제로 '즉각적'인 것이며, '성화'는 Level의 문제로 '점진적'인 것이다. 즉 둘은 구별되는 것이지만, 하나인 것이며 동시적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기독교는 '칭의'만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신학적 재정립이 필요하다.

---------------------------------------------------------------------청중의 Q-----------------------------------------------------------------------

Q4. 이슬람 신앙의 반 유대주의

 절대적이다. 서양국가들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에 대한 피해보상을 서양국가들이 아닌, 이슬람에게 강제되고있는 상황, 특히 가장 중요한 '물이 있는 곳'을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다는 상황에 대한 분노가 반유대주의화 되고 있다.

 더불어, 유대 진영에 존재하는 '친 이슬람주의자'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기자, 팔레스타인 핍박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신앙의 중심'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다.

 사회에는 분명 약자에 대한 '부드러운 괴롭힘', '소리없는 괴롭힘'이 존재한다. 이러한 괴롭힘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한 수준으로 증폭하고 있는 보수기독교....

Q5. 

 이 책은 구원론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오히려 '정치적'인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이 결국 주장하는 것은, 삼위일체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기독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Q6. 코란에 나타나는 것을 성경과 동급으로 놓아도 되는가?

 '그리스도인'에게는 무리이다. 우리는 성경과 삼위일체를 굳게 믿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이웃인 그들, 1000여년이 넘은 역사를 지닌 대상에 대한 태도로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Q7. 이슬람에는 '성령'이라는 개념이 없는데, 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구약에도 '성령'이라는 개념이 없다. 구약의 '하나님의 영'은 인격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양게서는 삼위일체로서 인격적인 존재로서 성령이 등장한다. 따라서 이슬람은 어떤 면에서 '유대교'와 비슷한 점이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Q8. 오늘 들은 이 내용들을 다른 교인들과 소통하고, 설명할 것인가?

송용원 목사: "인식대상"으로서 하나님, 공통 선의 개념을 꼭 기억해야 한다. 전인적인 방법, 경외심을 기초로 설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슬람도 신은 경외한다.", "이슬람도 하나님의 형상이 담긴 존재이더라.". 

김선욱 교수: "유일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랑의 대상을 확장해야 한다.